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9월

싸라리리 2025. 1. 1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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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임인

김만식(金晩植)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해방 총관(海防總管)이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겸대(兼帶)하게 하고 절차와 제도에서 그대로 둘 것과 없앨 것, 늘일 것과 줄일 것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해방아문(海防衙門)을 설치하는 것은 이미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강화 유수를 특별히 겸대하라고 명한 것은 진실로 공고하고 치밀하게 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찍이 진무영(鎭撫營)에서 관할하던 군사에 관한 사무를 이제 모두 다 해방아문에 속하게 하였으니, 진무사(鎭撫使)란 직함은 감하(減下)하고 인신(印信)은 예조(禮曹)에 보내서 녹여 없애게 하며, 총관(總管)의 병부(兵符)를 막 새로 주조했으니 유수(留守)의 병부를 승정원(承政院)에 올려 보내서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밖에 각 항목에서 그대로 둘 것과 없앨 것은 해 총관(總管)이 살펴보고서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기회(鄭基會)의 장계(狀啓)를 보니, ‘안무사(按撫使) 조병직(趙秉稷)의 이문(移文)으로 인하여 관북(關北) 10개 주(州)의 군전(軍田)의 환곡에 대한 문안(文案)과 3식년조 및 약재 외에 진헌하는 각종 수효를 성책(成冊)하여 이송하는 일은 마음대로 하기 곤란하니 조정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제때에 구별해서 편리한 대로 거행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안무사(按撫使)가 이문한 대로 시행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의 장계를 보니, 의주 전 부윤(義州前府尹) 김기수(金綺秀)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들면서 아뢰기를, ‘작년 봄에 경략사(經略使)가 다섯 개 진영(鎭營)을 없애버린 것에 대하여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삭주(朔州)의 구령(仇寧) 지경으로부터 해부(該府)까지는 100여 리 구간이 족히 되는데, 단지 옥강(玉江) 한 곳에 채장(砦將)을 둔 것은 변경의 실정을 놓고 볼 때 결국 허술한 것입니다. 수구진(水口鎭)을 다시 설치하고 영원히 해부에서 자벽(自辟)하는 자리로 만들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진영(鎭營)과 보루를 없애거나 줄일 것에 대해 경략사가 품하여 청한 것이 참작하여 헤아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의주(義州)의 보고와 도신(道臣)의 장계를 가지고 보건대, 100여 리 사이에 단지 하나의 채장을 둔 것은 변경의 정세로 보아 매우 소홀합니다. 그러니 수구진(水口鎭)을 이전대로 다시 설치하는 동시에 해부가 자벽하는 자리로 만들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2일 계묘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병조(兵曹)의 계목(啓目)으로 인하여 총관기연해방사무(總管畿沿海防事務總管)가 패용할 병부를 본 승정원(承政院)에서 만들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병부를 지금 이미 새로 만들었으니 총관기연해방사무 민영목(閔泳穆)을 즉시 패초(牌招)하여 전해 주고, 전 총융청(前摠戎廳)에 소속되었던 남양(南陽), 파주(坡州), 장단(長湍), 삭녕(朔寧), 마전(麻田), 고양(高陽), 교하(交河), 양천(陽川), 적성(積城), 연천(漣川) 등 고을의 속오군(束伍軍)을 해방아문(海防衙門)에 이속(移屬)한 뒤에 10개 고을의 병부 왼쪽을 총융청(摠戎廳)에서 지금 와서 바쳤으니, 똑같이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3일 갑진

우의정(右議政) 심순택(沈舜澤)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날 애타게 기다리던 끝에 경이 오늘 연석(筵席)에 나왔으니 내 마음이 참으로 기쁘다. 경은 반드시 현재의 우환거리를 깊이 살펴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으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은 본래 용렬하여 너무도 형편없는 사람인데 위로 전하의 은혜에 감격하고 아래로 의리와 본분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뻔뻔스러운 얼굴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신이 편안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더욱 감격스럽고 황송합니다."
하였다. 이어 사임시켜 줄 것을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쌓아 온 명망과 덕, 도량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것을 부지하고 어려운 것을 구제하기에 힘들 것 같지 않으니,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바로잡고 보좌하라."
하였다.

 

특별히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김홍집(金弘集)을 발탁하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심상훈(沈相薰)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참반 유생 응제(參班儒生應製)를 보여 시취(試取)할 때에 함부로 응시하여 입격(入格)한 정평(定平) 유학(幼學) 박춘권(朴春權)이 지금에야 자수하였습니다. 수군(水軍)으로 충정(充定)한다는 율문에 따라 병조(兵曹)에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성근(金聲根)이, ‘경상도(慶尙道) 고성부(固城府)의 임오년(1882) 조의 전세미(田稅米) 쌀 697석, 콩 188석을 실은 배가 작년 10월 고군산(古群山) 앞바다에 왔는데 때마침 풍랑을 만나 배가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얼음이 풀린 뒤에 호송하라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선주(船主)라고 하는 자가 법의 뜻을 망각하고 실려 있는 것을 몰래 팔았습니다. 그 정절(情節)을 따져보면 아주 흉악하기 그지없으니, 선주(船主) 김영주(金永柱)를 형구(刑具)를 채워 뇌수(牢囚)하고 감색(監色)은 관문(關文)을 보내 염탐해서 체포하고 곡물을 주관하는 관리인 고성 부사(固城府使) 정해식(鄭海植)은 먼저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4일 을사

전 평안 감사(前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를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각 읍의 삼정(三政)에 별다른 큰 폐단은 없는가?"
하니, 김영수가 아뢰기를,
"각 읍의 삼정에 크고 고질적인 폐단은 없지만 현재 일에 대하여 우러러 아뢸 것이 있습니다. 올해 도(道) 안의 농사 형편이 처음에는 크게 풍년들 가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름에는 큰물을 겪고 가을에는 바람이 많이 분 데다 우박까지 쏟아져서 산골이고 들이고 모두 흉년이 들었습니다.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여러 고을들은 이미 큰 흉년으로 판가름이 났고 청천강 이남은 비록 약간 괜찮게 된 곳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논하면 다같이 흉년입니다. 본도 각 읍의 양향(糧餉)과 환곡(還穀)을 받아들이자면 이제 창고를 열어야 하겠는데, 흉년이 든 해에 백성들의 사정이 실상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재해가 우심한 고을을 뽑아서 올해는 모곡(耗穀)으로 더 받는 곡식만 받고 원곡은 우선 정퇴(停退)하여 조정에서 백성들을 돌봐 주는 정사를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신(使臣)이 공적으로 쓰는 노자에 대해서 규정을 정해서 작년 봄부터 시행한 것은 바로 비용을 절약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정된 규례와 절목 외에 또 공적으로 쓰는 비용이 많고 절목에 올라 있지 않기 때문에 형편상 고을에서 마련하는 수밖에 없는데 결국에는 구획(區劃)할 곳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큰길가의 하나의 폐단이 되고 있으니, 묘당(廟堂)에서 도신에게 관문을 보내 규정 안에 첨가시켜 마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5일 병오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김홍집(金弘集)을 독판(督辦)으로 승차(陞差)하라고 명하였다.

 

김기석(金箕錫)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9월 6일 정미

특별히 김만식(金晩植)을 발탁하여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김영철(金永哲)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민영환(閔泳煥)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9월 7일 무신

동지상사(冬至上使) 이호준(李鎬俊)이 상소하여 체직(遞職)시키고 김만식(金晩植)으로 대신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원도 독련어사(江原道督鍊御史) 이도재(李道宰)의 별단(別單)을 보니, 그 하나는, 춘천부(春川府)에서 대동미(大同米), 전세(田稅), 호포(戶布)를 지방(支放)에 취해다 쓰고 있는데 설사 성상의 유시(諭示)를 받았다 하더라도 고을에서 그대로 쓰는 것은 사체에 결함이 됩니다. 그러니 해부(該府)에서 남겨 둔 군수전(軍需錢)을 상정(詳定)으로 대납(代納)하게 할 것입니다. 세곡(稅穀)을 떼어내어 지방을 보충하는 것은 참으로 군량이 부족하지 않게 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을 특별히 상정으로 대납하게 하소서.
그 하나는, 춘천부에 소속된 양향청(糧餉廳)의 둔전(屯田)과 새로 설치한 둔전에서 설사 올 가을부터 도조(賭租)를 거둔다 하더라도 내년의 지방이 태반은 부족하게 될 형편이니, 본 춘천부에서 대동미(大同米)로 바치는 좁쌀 270석을 내년부터 상정으로 대납하게 하소서. 둔전(屯田)에서 거두는 것만 가지고 부족하게 될 것이 예견되면 감영(監營)이 있는 고을에서 좋은 쪽으로 조처하게 하고, 정공(正供)은 해마다 제기하는 것은 부당하니 그대로 두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정식 부세(賦稅)는 과연 상정으로 대납하게 하기가 곤란하나 군사 비용으로 쓰는 것은 다른 것과 구별되니, 내년부터 또한 특별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 평안 감사(前平安監司) 김영수(金永壽)가 아뢴 것을 보니, 각 읍에서 양향곡(糧餉穀)과 환곡(還穀)을 이제 창고를 열어 받아들여야 하는데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의 사정이 실상 어렵고 궁핍하니, 재해가 우심한 고을에 대해서 단지 모곡(耗穀)만 받고 원곡은 우선 정퇴하여 줄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양향곡은 규정을 세운 본의가 설사 중하기는 하지만 흉년든 해에 백성들의 사정도 생각해 주어야 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해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방금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우선(尹宇善)의 보고를 보니, ‘연안부(延安府)의 허결(虛結)은 909결(結) 62부(負) 5속(束)이고, 배천군(白川郡)의 허결은 158결(結) 36부(負) 4속(束)인데 만약 따로 바로잡지 않게 되면 장차 고을이 없어져야 그만둘 형편입니다. 두 고을의 허결을 모두 특별히 영원히 묵이는 토지로 잡아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토지 면적은 중대하여 거론하기가 어렵지만 백성들의 고통에 관계되는 일인 만큼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두 고을의 진결(陳結)에 대하여 다같이 5년에 한해서 조세를 감면시켜 주고 기한이 되면 다시 총량을 회복시키라고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9월 10일 신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전영(前營) 상번 병정을 연조(演操)하였다.

 

9월 11일 임자

우정총국(郵征總局)에서, ‘앞으로 체신 사무를 시작할 것이니 본국의 직제 규정, 사무 규정, 체신 규칙, 경성(京城) 안에서 체신 사무의 개설 규법 및 경성(京城)과 인천(仁川) 사이의 체신 사무 규법을 각각 책자로 만들어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12일 계축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농사, 누에치기, 천 짜는 일, 사기그릇과 벽돌 굽는 일, 목축, 종이와 차를 만드는 일 같은 것은 모두 경상 비용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장내사(掌內司)에서 어느 정도 경영하고 있으나 장사(掌事)하고 간무(幹務)하는 원역(員役)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과 여러 가지 조처할 문제들을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절목을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 이밖에 백성들을 가르치고 산업을 부흥시킬 일이 있으면 장내사(掌內司)에서 규례대로 초기(草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갑인

진전(進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배참(陪參)하였다.

 

서신보(徐臣輔)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충주(忠州)의 진사(進士) 경준(慶焌) 등이 상소하여 충주에 궁을 세울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전일의 비답이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철원(鐵原)의 유학(幼學) 이희완(李喜完) 등이 상소하여 고(故) 충익공(忠翼公) 이최응(李最應), 문충공(文忠公) 김보현(金輔鉉), 충숙공(忠肅公) 민겸호(閔謙鎬)에 대하여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 문제는 조정에서 처분할 일이니,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이기언(李驥彦)이 상소하여 시무(時務) 8조(條)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인재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의병(義兵)을 양성하는 것이고, 셋째는 과거제도를 엄하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는 것이고, 다섯째는 관작(官爵)과 녹봉(祿俸)을 중시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지방 관리의 녹봉(祿俸)을 줄이는 것이고, 일곱째는 봉수대를 정비하는 것이고, 여덟째로 담배를 금지시키는 것이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여러 조목들에 간혹 취할 만한 것이 있다."
하였다.

 

9월 14일 을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전영(前營) 상번(上番) 병정의 군사 훈련을 보니, 활도 쏘고 행군도 하는 것이 자못 볼 만하였다. 여러 해 노력하고 매우 애쓴 것이 가상하니, 전 남병사(前南兵使) 윤웅렬(尹雄烈)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여규익(呂圭益)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9월 15일 병진

편전(便殿)에 나아가 일본 공사(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육해군 사관(陸海軍士官)을 접견하였다.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아뢰기를,
"떠나올 때에 우리 황제가 유시하기를, ‘조선국 대군주가 세계 정세를 살펴보고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와 교화를 일신시키며 밤낮없이 정력을 기울여서 개명한 정치를 하고 있다. 이제 임오년(1882) 강화조약(講和條約) 제4조에 지적된 보상금 50만 원 가운데서 40만 원을 되돌려 주어 개명한 정치를 실시하는 데 보태 쓰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의가 지극하므로 감사하기 그지없다. 경은 이런 내용으로 전달하라."
하였다. 또 일본 외무경(外務卿)이 보내는 무라다식〔村田〕 총을 대군주와 왕세자에게 각각 1자루씩 바치면서 아뢰기를,
"새로운 정사를 찬양하여 우리의 성의를 표시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그 이름만 들었는데 오늘 실물을 보게 되었다. 응당 보물로 삼겠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 남병영(前南兵營) 병정 전원이 오래도록 머무르게 한 것은 민망하니, 돌아가며 번 들러 올라오도록 하여 먼 지방 백성들의 사정이 펴지도록 하라고 전영(前營)에 분부하라."
하였다.

 

윤태준(尹泰駿)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가교(駕轎) 조성 시 사복시 도제조(司僕寺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친군 전영(親軍前營)의 상번(上番) 병정의 연조(演操) 시 장졸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국(金炳國)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높은 관리가 벼슬을 떠나는 것은 원래 때가 있는데, 돌아보건대 오늘 경이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것은 경이 나라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고,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은 경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와 같은 덕망과 이와 같은 기량으로 이처럼 어려운 때에 책임을 맡지 않으려 하고 머뭇거리면서 물러갈 생각을 하는 것은 바로 사리에 비추어 말이 되지 않거니와, 조정과 민간의 논의가 장차 어떤 쪽으로 논하겠는가? 경의 병이 근심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청에 누워서 정사를 논하기에는 넉넉하다. 더구나 나라와 백성의 병통이 아주 깊으니 용한 의원이 처방을 내고 약을 써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나를 보좌하고 인도하여 널리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니 경이 어떻게 나에게 사직할 수 있고, 내가 어떻게 경을 버릴 수 있겠는가? 설사 하루에 열 번 글을 올리더라도 들어줄 리 만무하니 경은 이해하라."
하였다.

 

9월 16일 정사

전교하기를,
"다섯 가지 금속인 금(金), 은(銀), 동(銅), 철(鐵), 연(鉛)은 바로 자연에서 얻어지는 이로운 광물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히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다. 광산을 개발하여 채취하는 일을 장내사(掌內司)에서 전적으로 주관하고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단속하여 영원히 금지시키되, 국(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등의 문제는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절목을 마련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국(金炳國)에게 별유(別諭)하기를,
"경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속마음을 터놓고 반복해서 말하였는데, 경은 이러한 때에 떠나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현재의 형편은 황급하고 어수선하여 알을 포개 놓고 바둑돌을 겹쳐 놓은 격이라는 말로도 그 위급한 것을 비유할 수 없다. 널리 수습하고 착실하게 보좌하는 것은 오직 정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신임하고 의지하였는데, 이제 진퇴 거취의 절차를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큰 직임을 맡을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크게 기대하던 것이겠는가?
지난번의 일은 경이 처의(處義)가 오히려 너무 지나쳤는데, 어떻게 함부로 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의정(右議政)이 출사(出仕)하였으니 함께 공경하며 일을 잘 해나가는 기쁨이 있어야 할 것인데, 더욱 어떻게 가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은 반드시 때에 맞게 몸조리를 잘하여 빨리 자신의 병도 고치고 나라의 병통도 고쳐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실상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더없이 큰 다행이다. 이에 마음을 터놓고 별유하는 것이니, 꼭 지극한 뜻을 체득하고 다시는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윤태준(尹泰駿)을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로 도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이호준(李鎬俊)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윤자승(尹滋承)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민병석(閔丙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전영(前營), 좌영(左營), 우영(右營), 후영(後營)에서 아뢰기를,
"이전에 각영(各營)에서 도시(都試)를 매년 가을에 한 번씩 설행한 전례가 있는데 기병(騎兵)이 이미 마군소(馬軍所)에 소속된 조건에서 사영(四營)에서 기예를 시험하는 절차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고무하고 장려하는 방도에서 어찌 기병과 보병(步兵)을 차별할 수 있겠는가? 보군의 도시(都試)도 설행하라."
하였다.

 

9월 17일 무오

통제사(統制使) 이원회(李元會)를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계청(啓請)하였기 때문이다.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의 군포(軍布)와 신포(身布)를 각 아문(衙門)에 바치는 것은 순전(純錢)으로 바치고, 각 영문(營門)에 바치는 것은 5분의 1을 대전(代錢)하도록 특별히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목화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각 해당 도의 도신이 장계로 청한 것과 관련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안흥진(安興鎭)에 설치한 포군(砲軍)에 대하여 장교(將校)와 함께 도시(都試)를 합설(合設)하고, 바닷가 고을과 진영(鎭營)의 포수(砲手)들은 각각 그 고을에서 규례대로 설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것과 관련하여 통리군국아문(統理軍國衙門)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9월 18일 기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겨울철이 다가오는 때에 도성의 쌀 사정이 매우 어려워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여 형편이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몇 만 백성들이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제로(諸路)에서 힘써 운반해 오는 것인데, 근래에 열읍(列邑)에서 문득 모두 숨겨 두고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서울과 지방의 장사꾼들의 판로가 끊어졌으니,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삼현령(三懸鈴)으로 경기(京畿)와 해서(海西), 삼남(三南)에 관문으로 신칙하여 빨리 편리한 대로 사게 하되, 만약에 형식적인 문구(文具)로만 여기면서 여전히 막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해당 수령(守令)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들일 것이며, 단속하지 못한 도신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특별히 바르게 경계하도록 일체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쌀을 사서 곡식을 옮기는 것을 청하는 것은 옛날의 정사인데 어떻게 막도록 놔둘 수 있겠는가? 특별히 말을 만들어 관문을 보내 신칙하여 실효가 나타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0일 신유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전에 내린 묘당(廟堂)의 계품(啓稟)에 대한 비답을 이미 보았을 것이다. 요즘 도성의 곡식 값이 뛰어올라서 백성들의 사정이 날로 더욱 나빠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외도(外道)에서 곡식이 나가는 것을 막아서 유통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매우 딱하고 답답하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어제의 비지(批旨)는 이미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곡식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법제(法制)에 없는 것입니다. 감사(監司)는 한 도(道)를 관할하고 수령(守令)은 한 지역을 관할하므로 수령은 한 고을의 백성들을 위해서 간혹 한 지역의 곡식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한 도를 골고루 살펴보므로 오히려 막는 것을 풀어놓자고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관문으로 신칙한 뒤이니 반드시 마음을 다해서 받들어 앞으로 서울과 지방의 몇 만의 백성들이 두터운 실제 혜택을 골고루 입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성은 바로 공적인 곡식과 사적인 곡식이 모두 모여드는 곳입니다. 그뿐 아니라 올해의 농사 형편을 들으니, 경기(京畿), 호서(湖西), 해서(海西)는 다 풍년이 들었으나 양남(兩南)은 몇 고을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제로(諸路)를 통틀어 따져보면 흉년이라고 말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며칠 전에는 도성의 시전(市廛)에서 곡식을 매매하기 어렵게 되어 모든 백성들의 사정이 매우 황급하게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 이내로 쌀장사꾼들이 점차 모여들고 쌀 시장도 열어서 비록 전처럼 많이 쌓아 놓고 팔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전에 비하면 그래도 안심된다고 말할 수 있으니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당오전(當五錢)은 절대로 변통시킬 수 없으나 사적으로 주조하는 것은 기필코 금지시키고야 말겠다. 백성들이 무지하여 점점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것은 필경 간사한 무리들이 통용할 것에 대한 명령이 내리기를 바라면서 사적으로 주조할 계책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신(道臣)과 수령(守令)들은 비단 명백히 타일러 소란을 피우는 것을 그만두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간혹 이 기회를 타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통탄할 일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고 간사한 무리들이 분수에 넘치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감사(監司)들까지 어떻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가령 허다한 수령 가운데 간혹 이런 비방을 듣는 자가 있다면 물론 철저히 다스려야 할 것이지만 어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무지한 백성들이 조정의 명령을 믿지 않는 것은 주로 풍속이 예전만 못하여 세상 만사가 믿음이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어떻게 주조하는 것을 금지시키거나 통용시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절대로 변통시킬 수 없습니다. 설사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타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이 하나의 신(信) 자를 하늘의 운행이나 네 계절처럼 믿게 된다면 어찌 금지시켜야 할 것을 금지시키지 못할까 근심하고, 어찌 통용시켜야 할 것을 통용시키지 못할까 근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자연히 믿게 되는 것은 그 효과가 멀리 가고 오래 가지만 시켜서 믿게 되는 것은 그 효과가 가깝고 잠시입니다. 생각하건대, 지금 위아래에서 힘써서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곡식 값은 자연히 안정되고 화폐는 자연히 통용될 것입니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유연(金有淵)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가 곧 체직(遞職)시키고 김기석(金箕錫)으로 대신하였다.

 

9월 21일 임술

조충희(趙忠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기연해방아문(畿沿海防衙門)에서 아뢰기를,
"대부(大阜)의 여러 섬은 일찍이 목장 관리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없애서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방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해당 섬의 토지와 백성들은 모두 다 호적을 나누어 영종(永宗)과 법성(法聖)을 단독 진영으로 만든 것처럼 하고 부세를 거둔 것은 군사 비용에 넘겨 변경 방비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대부(大阜), 영종(永宗) 두 목장에 지금 남아 있는 말은 태반이 병이 들어 날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이미 관할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衙門)에서 나누어 가지도록 허락하여 타거나 짐을 싣게 하여 쓸 수 없는 것을 실질적으로 쓰게 하는 것이 알맞은 일일 것 같습니다.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얼마 뒤에 의정부(議政府)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경주(慶州) 생원(生員) 이능모(李能模)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죄 없이 등용되지 못하고 침체되어 원통한 마음을 품어 온 지가 30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열성조(列聖朝)의 민망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교서(敎書)와 인재를 조용(調用)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데 대한 여러 이름 있는 선비들의 논설이 해와 별처럼 밝고 법처럼 중한데, 성덕(聖德)이 거듭 새로워지고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져서 어진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서 그 부류를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만을 추천하게 하니, 안으로는 전조(銓曹)에서 밖으로는 감사(監司)나 군사 통솔자를 구애할 것이 없이 널리 추천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잠시나마 죽지 않은 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영남(嶺南) 한 구역의 수많은 사람들이야 어떻게 벼슬하여 억울한 마음을 풀 수 있겠습니까? 집안 안에서는 윤리가 없어지고 동리(洞里) 안에서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구분이 없어서 심지어 향교(鄕校)나 서원(書院)의 책임을 맡아보는 반열에서조차 배척하여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출입하는 데에 제한을 두고 말하는 데에 구분을 둡니다. 훌륭한 세상을 만났다가 결국 윤리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자가 되고 말았으니, 우리가 또한 불쌍하지 않습니까. 아! 또한 슬픕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온 나라 사람들을 똑같이 보아 거두어 두고 배양하고 키워서 집안에서 윤리를 바로잡게 하고 제사의 반열에 등용하여 생성의 혜택이 완결되도록 해 주소서.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억울한 것을 풀어 주어야 할 것이니, 도신(道臣)에게 자세히 조사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박제관(朴齊寬)이, ‘화적 엄만손(嚴萬孫) 등 5명을 효경(梟警)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 22일 계해

진전(進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9월 23일 갑자

김만식(金晩植)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홍우길(洪祐吉)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남일우(南一祐)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민치서(閔致序)의 장계(狀啓)를 보니, ‘강릉(江陵) 등 9개 고을은 재해를 입은 것이 우심하므로 만약에 규례대로 환곡(還穀)을 납부하게 하면 장차 흩어져 달아날 우려가 있습니다. 지방(支放)으로 지출할 것과 이번의 황장목(黃腸木) 운반 비용 등에서 회감(會減)할 것은 그 수량을 참작해서 똑같이 배정하여 대전(代錢)하게 하는 외에, 그밖에 응당 바치게 되어 있는 본곡(本穀)은 내년 가을까지 정퇴(停退)하고 대동포(大同布)와 각 군포(軍布)를 특별히 순전(純錢)으로 대납(代納)하도록 허락하는 일을 모두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달째 장마가 져서 흉년이 들었는데 영동(嶺東)이 가장 심하니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환곡(還穀)을 거두고 포(布)를 거두는 것이 물론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백성들의 형편을 먼저 특별히 돌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도신이 연분 장본(年分狀本)을 올리기 전에 이렇게 치계(馳啓)를 올린 것으로 보아 그 황급한 정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환곡에 대해서는 부득불 써야 할 것은 배정해서 대전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특별히 정퇴하며, 대동포(大同布)와 군포(軍布)는 실상 전량을 요청한 대로 들어주기 곤란한 만큼 모두 다 절반을 대전하게 하여 조정에서 자신의 몸이 상하는 것처럼 보호하여 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6일 정묘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헌영(李𨯶永)을 소견(召見)하였다. 하직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의주부(義州府)는 비단 변방의 중요한 지대일 뿐 아니라, 관시(關市)에서 교역하는 것이 이전에 비해 다르므로 세금 규정과 그밖에 여러 가지 문제를 더욱더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내려가게 되면 진심으로 나의 뜻을 받들어 잘 선양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군사를 두는 것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변방의 중요한 지대인 만큼 응당 군사를 양성해야 할 것인데, 듣자니 고을이 매우 영락된 데다 올해에 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 딱하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농사 형편이 이미 큰 흉년에 가까워서 백성들의 정상이 갈수록 더욱 황급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어떻게 어루만져 보호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백성을 보존해야 군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은 해 도신이 하직할 때 이미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였으니, 도신과 잘 상의해서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도신과 상의해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의주부에 일찍이 설치한 군사가 있다고 하는데 그 수효를 잘 모르겠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신도 요즘에야 비로소 듣고 알아서 아직은 그 수효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체로 군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인원수가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정예로운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교역하는 데서의 이익은 수출하는 것이 많은 반면에 수입하는 것이 적은 데 달려 있다. 반드시 자연히 생산되는 것이 적고 사람이 만든 물건이 많아야 흥성할 수 있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본은 수출품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제일 많은가?"
하였다. 이헌영이 아뢰기를,
"실〔絲〕과 차〔茶〕가 가장 많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일본의 실과 차, 영국과 미국의 보리, 프랑스의 비단, 러시아의 소가죽, 독일의 자기(磁器)는 모두 그 나라에 알려진 생산품들인데,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신이 연전에 일본에 갔을 때 더러 보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 가운데서 콩과 소가죽 같은 것들은 각국에서 귀하게 여기고 있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부산(釜山)에서 수출되는 것을 보면 소가죽, 콩, 팥, 미역류 등의 물품이 많은데, 각국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책문(柵門)에서 구련성(九連城)에 이르는 지방에서는 콩으로 기름을 짜서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준다고 하는데, 의주는 이곳과 가까우니 그 방법을 배워다가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면 좋겠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일인데 어찌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후창(厚昌), 자성(慈城), 강계(江界), 창성(昌城)에 나무가 무성한데 근래에 청(淸) 나라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베어간다고 하니, 어찌 마음대로 베어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사람을 보내어 간검(看儉)하게 하고 규례대로 세금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까닭 없이 남에게 줄 수 없으니, 일체 엄금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사람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한 다음 도신과 상의하여 조처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의주는 청(淸) 나라와 한 줄기의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만약 강이 얼어붙으면 육지와 같아지므로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데, 이것은 변경 문제와 크게 관계된다. 만약 다른 지방의 항구의 규례대로 길을 연다면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이니,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고 사세를 참작하여 의정부에 논보(論報)하거나 장문(狀聞)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헌영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아주 지당합니다. 내려간 뒤에 형편을 자세히 살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널리 알아봐서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구련성(九連城)에서 인삼세〔蔘稅〕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는데 은(銀)으로 단위를 정한 것이 자그마치 6, 7전(錢)이나 된다. 이것이 큰 폐단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사신이 가는 편에 변통해 보려고 하니, 그대도 세 사신(使臣)과 상의하라."
하였다.

 

9월 29일 경오

함북 행영(咸北行營)의 도시(都試)를 회령 부사(會寧府使)가 시험을 주관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던 것을 그만두고 안무사(按撫使)가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안무사가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일로 인하여 의정부(議政府)에서 복계(覆啓)하였기 때문이다.

 

9월 30일 신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다.〖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조종우(趙鍾宇), 김병수(金炳秀), 정승현(鄭承鉉), 유관수(柳觀秀), 송병주(宋秉宙), 민계호(閔啓鎬), 윤명섭(尹命燮), 윤상연(尹相衍), 김희수(金喜洙), 이승구(李承九), 박이양(朴彛陽), 민경호(閔京鎬), 조병성(趙秉聖), 김규영(金奎濚), 윤익(尹瀷), 박기훈(朴岐勳), 박영두(朴永斗), 송규회(宋奎會), 민영수(閔泳壽), 이귀상(李龜相), 남주원(南周元), 정우묵(鄭佑默), 윤상학(尹尙學), 이서영(李瑞永), 민정식(閔正植), 홍종헌(洪鍾憲), 박제영(朴齊永), 이만정(李晩正), 이수홍(李秀洪), 윤기진(尹起晉), 김정균(金貞均), 권영수(權榮洙), 김춘희(金春熙)이다.

 

우정총국(郵征總局)에서, ‘우정 사무를 이번 10월 1일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우정국(郵征局)을 설치할 곳과 우편물을 운반할 때에 깃발로 표시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합당한 깃발 도안과 각과(各課)의 사업 분담을 적어서 들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상소하여 휴치(休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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