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650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7월

7월 1일 갑진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의 추향(秋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7월 2일 을사첫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7월 4일 정미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소견(召見)하였다. 이경재(李景在)를 병조 판서로, 민치성(閔致成)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5일 무신두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수찬 남종순(南鍾順)이 상소하여 김진형(金鎭衡)을 논척(論斥)하니, 비답하기를,"김진형의 해망(駭妄)함은 간삭(刊削)에 그칠 수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즉시 찬배(竄配)의 율(律)을 의논하게 하라."하였다. 7월 6일 기유김진형(金鎭衡)을 함경도 명천부(明川府)로 귀양보냈다. 7월 7일 경술이학수(李鶴秀)를..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6월

6월 1일 갑술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두순(趙斗淳)을 상신(相臣)에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이규철(李圭徹)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 6월 2일 을해김상우(金相宇)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서헌순(徐憲淳)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5일 무인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6월 7일 경진서기순(徐箕淳)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6월 9일 임오김병교(金炳喬)를 이조 참판으로, 이돈영(李敦榮)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6월 10일 계미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2일 을유윤치수(尹致秀)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8일 신묘우의정 ..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5월

5월 1일 을사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하향(夏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일강(日講)하여 《시전(詩傳)》 제3권을 강하였다. 5월 2일 병오일강(日講)하였다. 5월 3일 정미일강하였다. 하교하기를,"동조(東朝)의 탄신(誕辰)이 곧 이르니, 나 소자(小子)의 강릉(岡陵)024) 을 축하하는 정성이 해마다 더욱 간절하다. 경축하는 예(禮)는 매양 풍형(豐亨)을 염려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겸손한 덕은 진실로 흠앙(欽仰)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하정(下情)에 결연(缺然)함이 있으니, 조금이나마 펴는 것이 마땅하다. 이번 15일은 마땅히 대내(大內)에서 친히 전문(箋文)을 올리고 단지 표리(表裏)만을 올..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4월

4월 1일 을해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하향(夏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일강하였다. 4월 2일 병자일강하였다. 4월 3일 정축일강하였다. 4월 4일 무인일강하였다. 4월 5일 기묘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일강하였다.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4영 파총(四營把摠)의 자벽과(自辟窠)018) 와 좌·우포청(左右捕廳)의 종사관(從事官)은 모두 실직(實職)으로 시행하고, 허사과(虛司果)는 서차(序次)를 따라 구처(區處)하며, 각도의 수군 우후(水軍虞候)의 과한(瓜限)은 전례에 의하여 24개월로 정식(定式)하소서."..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3월

3월 2일 병오소대(召對)하였다. 이응식(李應植)·신관호(申觀浩)·이능권(李能權)·김건(金鍵)을 모두 양이(量移)하라고 명하였다. 3월 3일 정미소대(召對)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연차(聯箚) 【대사헌 강시영(姜時永), 집의 신좌모(申佐模), 장령 나채규(羅采奎), 지평 김창수(金昌秀)·임한수(林翰洙), 대사간 이명적(李明迪), 사간 김덕근(金德根), 헌납 ..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2월

2월 1일 병자일강하였다. 2월 1일 병자김병국(金炳國)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니, 중비(中批)010) 에 의한 것이었다. 유장환(兪章煥)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2일 정축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사직(社稷)의 춘향(春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일강하였다. 2월 3일 무인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2월 4일 기묘경모궁(景慕宮)의 춘향(春享)을 행하였다. 2월 5일 경진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일강을 행하였다. 2월 6일 신사일강하였다.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김..

철종실록5권 철종4년 1853년 1월

1월 1일 병오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1월 2일 정미이용상(李容象)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1월 3일 무신종묘(宗廟)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1월 4일 기유종묘(宗廟)의 춘향(春享)을 행하고, 순종 대왕(純宗大王)의 추상 존호(追上尊號)와 책보(冊寶)001) 를 올렸다. 1월 5일 경술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사직 기곡 대제(社稷祈穀大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1월 6일 신해하교하기를,"열읍(列邑)의 적곡(糴穀)002) 의 폐단에 대한 보고를 보면, 염산(斂散)의 폐해(弊害)가 없는 ..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12월

12월 1일 병자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2일 정축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2월 3일 무인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일강을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헌납 김영기(金永基)가 상소하여 병조 당상(兵曹堂上) 문경애(文慶愛)를 논박(論駁)하자, 비답하기를,"기당(騎堂)057) 의 일은 먼 지방에 있던 사람이 관례에 어두운 소치이니, 어찌 크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소청이 지나치니, 방축(放逐)의 율(律)로 시행하도록 하라."하였으니, 군호(軍號)를 수계(修啓)할 때 ‘추숭(追崇)’ 두 자로 서계(書啓)한 까닭이었다. 양사(兩司)에..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11월

11월 1일 정미일식(日食)이 있었다. 일강하였다. 이규팽(李圭祊)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제달(李濟達)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병덕(金炳德)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건서(李健緖)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이제도(李濟道)를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2일 무신《문원보불속편(文苑黼黻續編)》을 반포하고, 감동(監董)한 각신(閣臣)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이희경(李熙絅)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3일 기유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동향(冬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소대하였다. 11월 4일 경술소대하였다. 11월 5일 신해소대하였다. 11월 6일 임자소대하였다. 11월 7일 계축추조(秋曹)에 명하여 합제(合製) 때에 시장(試場)을 어지럽힌 정현념(鄭..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10월

10월 1일 무인김경선(金景善)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0월 2일 기묘종묘(宗廟)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였다. 10월 3일 경진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0월 4일 신사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0월 5일 임오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일강(日講)을 행하였다. 10월 6일 계미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0월 7일 갑신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10월 8일 을유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0월 9일 병술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10월 10일 정해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이헌구(李憲球)가 아뢰기를,"송도 유영(松都留營)의 분교관(分敎官)·분직장(分直長)의 달수는 각각 15개월 뒤에 차례..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9월

9월 1일 무신하교하기를,"추판(秋判)047) 의 일은 내가 매우 의혹스럽게 여긴다. 지난 일은 별달리 추론(追論)할 단서가 없는데, 관직을 제수하면 문득 인피(引避)하니, 그 마음의 소재를 알 수 없다. 다시 지나치게 인피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사례하라는 뜻을 다시 신칙(申飭)하도록 하라."하였다. 9월 2일 기유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안핵사(按覈使) 이시우(李時愚)를 소견(召見)하였는데,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9월 3일 경술태백성이 나타났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했던 권돈인(權敦仁)의 일을 정계(停啓)하고, 양사(兩司)에서 합계했던 김정희(金正喜)의 일을 정계하였다. 9..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8월

8월 1일 기묘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추향(秋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8월 3일 신사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명하여 어진(御眞)을 대내(大內)로부터 주합루(宙合樓)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8월 5일 계미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났다. 8월 6일 갑신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7일 을유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8일 병술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9일 정해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사직(社稷)의 추향(秋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8월 10일 무자태백성이 나타났다. 8월 11일 기축태백성이 나타났다. 이약우(李若愚)·조두순(趙斗淳)·서기순(徐箕淳)·조학년(趙鶴年)·김학성(金學性)·이경재(李景在)·김경선(金景善)·이돈영(..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7월

7월 1일 기유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추향(秋享)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7월 5일 계축이원명(李源命)을 이조 참의로, 홍직필(洪直弼)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7월 6일 갑인소대(召對)하였다. 7월 7일 을묘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였으니, 추알(秋謁)이었다. 7월 8일 병진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청컨대 죄인(罪人) 이태형(李泰亨)·도유화(都兪和)를 모두 다시 엄중히 형신(刑訊)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하니, 하교하기를,"남아(南衙)·북시(北寺)는 서로 통하여 알아서는 아니될 금령(禁令)이 있는데도, 거리낌 없이 보통으로 왕래하면서 정망(政望)을 도점(圖點)하는 계획이 있기에 이르러 전설(傳說)..

철종실록4권 철종3년 1852년 6월

6월 1일 경진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6월 2일 신사홍종응(洪鍾應)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요즈음 양서(兩西)034) 도신(道臣)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진휼하는 일은 이미 끝내었고, 양맥(兩麥)이 차례로 풍년이 들어서 유망(流亡)하던 백성이 서로 이끌고 환집(還集)하고 있다 하니, 예전에 황급하던 일이 과연 잘 진정(鎭定)되었으며, 전에 쇠약하고 수척하던 자도 모두 소생(蘇生)하였으며, 비가 내리고 개임도 알맞아서 못자리의 염려가 없으며, 전야(田野)를 개간하여 황폐한 탄식이 없는가? 아! 백성을 회보(懷保)하는 것은 어느 때인들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마는, 황해도와 평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