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675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윤5월

윤5월 1일 갑진박선수(朴瑄壽)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경흥 부사(慶興府使) 유석(柳)을 중화부(中和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정세가 있다고 하면서 명령을 어기고 부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방금 듣건대, 전 정언(正言) 이범진(李範晉)이 어제 집을 파는 일 때문에 중국 상인에게 이끌려 상무공서(商務公署)에 도착하여 공초를 받는 책임 각서를 쓰기까지 하였는데, 형조(刑曹) 낭관(郞官)과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 종사관(從事官)이 다른 일로 인하여 그 자리에 있다가 이어서 함께 신리하였다고 합니다. 이범진은 대시(臺侍)인데 조령(朝令)도 없이 제멋대로 신문하여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켰으니 극히 놀랍고 망녕스럽습니다. 그 자리에 참가한 당해 형조 정랑..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5월

5월 1일 을해심순택(沈舜澤)을 시강원 우빈객(侍講院右賓客)으로, 민영목(閔泳穆)을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삼았다. 5월 2일 병자민영익(閔泳翊)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전 장령(掌令) 박형동(朴衡東)과 방외 유생(方外儒生) 김기홍(金基洪) 등이 각각 상소하여, ‘수원(水原)과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 다시 제사를 회복시켜 주소서.’라고 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전 지평(持平) 한필은(韓必殷)이 상소하여 시폐(時弊)에 대해서 진달하니, 비답하기를,"진달한 도적을 없애는 문제는 과연 절실하고 시급한 일이다. 묘당(廟堂)에서 해도(該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기어이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라."하였다. 5월 3일 정축의정부(議政府)에서, ‘오 제..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4월

4월 1일 을사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전 승지 홍순학(洪淳學)을 인천항통상사무감리(仁川港通商事務監理)로 차하(差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공인(貢人)에게 폐단에 대한 소회(所懷)를 묻는 것에 대하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소회를 말한 것 가운데서 취해서 보니 제용감(濟用監)의 공인 등이, ‘진배(進排)할 물품이 많고 각종 물건들은 귀한데 값을 받는 것이 적체되어 빚장부가 산더미와 같으니 특별히 돌봐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이 공납(貢納)의 폐단의 실상이 과연 호소한 것과 같으니 공채(公債)는 거론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채 중 10년 이상 분에 대해서는 제용감(濟用監)에서 상세히 조사하여 탕감하도록 해야 합니다.빙고(氷..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3월

3월 1일 병자황단(皇壇) 봉실(奉室)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 예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선무사(宣武祠), 충렬사(忠烈祠), 현절사(顯節祠)에 순조(純祖) 갑신년(1824)의 전례대로 치제(致祭)하고, 무열사(武烈祠)에는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의주(義州)에 있는 여러 의사(義士)들의 제단과 천장인(泉漳人)의 제단에는 향과 축문을 내려 보내는 동시에 본도에서 차관(差官)을 정하여 보내서 함께 치제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윤 충정공(尹忠正公), 오 충렬공(吳忠烈公), 홍 충정공(洪忠正公) 등 세 집안의 자손들에 대하여 해당 조(曹)에서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로 자리를 만들어 조용(調用)하되 이 제독(李提督)의 봉사손(奉祀孫)은 수령(守令..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2월

2월 1일 정미경기 감사(京畿監司) 김홍집(金弘集)이, 지난달 29일에 중국의 태안선(泰安船)과 해정선(海靖船) 2척이 서쪽을 향하여 출발하고 흠차 제독 오장경(吳長慶) 일행이 협의관(協議官) 변원규(卞元圭)와 함께 말을 타고 떠났다고 아뢰었다. 2월 2일 무신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전번에 암행 어사(暗行御史)의 단자(單子)와 관련하여, 나주(羅州) 등 10개 고을의 묵힌 토지〔陳結〕에서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것을 사실대로 보고하라는 뜻으로 복계(覆啓)하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지금 해당 감사(監司) 김성근(金聲根)의 보고를 보니,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의 큰 흉년을 겪은 뒤에 백성들이 흩어져가고 토지가 황폐화되어 열 고을의 진결(陳結)에서 백징(白徵)하는 실상이니 실로 남도(..

고종실록21권, 고종21년 1884년 1월

1월 1일 정축【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제21권】 전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룻날이다. 도승지(都承旨)가 운현궁(雲峴宮)에 가서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원본】 25책 2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35면【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전교하기를,"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룻날이다. 도승지(都承旨)가 운현궁(雲峴宮)에 가서 문후(問候)하고 오게 하라."하였다.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청(淸) 나라 ..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12월

12월 1일 정미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방금 두 통의 자문(咨文)을 보니, 하나는 봉천(奉天)과 조선 변방 백성들의 무역 장정(章程)을 토의한 대로 하라는 교지를 받은 일에 대한 북경 예부(北京禮部)의 자문(咨文)이고, 하나는 중강(中江)의 교역 장정 책자를 지조(知照)하는 일에 대한 성경예부의 자문이었습니다.받았다는 내용으로 각각 회자(回咨)를 지어 파발(擺撥)에게 붙여서 의주부(義州府)에 내려 보내어 들여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경기(京畿) 유학(幼學) 박지양(朴之陽) 등이 상소하여 문목공(文穆公) 유숭조(柳崇祖)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예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는 일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는데, 어떻..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11월

11월 2일 기묘동지 삼사(冬至三使) 를 소견(召見)하였다.【정사(正使) 민종묵(閔種默), 부사(副使) 이원일(李源逸), 서장관(書狀官) 서상우(徐相雨)이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유생 이능돈(李能敦) 등이 올린 상소에,"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와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을 문묘에 배향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이미 전에 비답하였다. 이것은 이처럼 시끄럽게 굴 문제가 아니다.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하였다. 11월 3일 경진연풍(延豐)의 진사(進士) 김재준(金在俊)이 올린 상소에,"곤전(坤殿)이 내려가 있었던 곳에 궁전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소서."하니, 비답하기를,"이렇게 일을 확대시킬 필요 없다."하였다. 11월 4일 신사소대(..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10월

10월 1일 무신일식(日食)이 있었다. 전교하기를,"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교련병대(敎鍊兵隊)를 어영청(御營廳)에 이속(移屬)시켜 연습(鍊習)시키도록 분부하라."하였다. 10월 2일 기유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3일 경술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에서 수고한 백성들의 이름을 성책(成冊)하여 도신(道臣)이 이번에 비로소 보고하였습니다. 이것은 특지(特旨)로 수소문하여, 수고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표창하는 전하의 거룩한 뜻입니다. 전 오위장(前五衛將) 장희문(張羲文)은 외직(外職)에 조용(調用)하고, 유학(幼學) 노인용(盧仁鏞)은 초사(初仕)에 조용하고, 양인(良人) 윤용문(尹龍文) 등은 모두 첩가(帖加)를 성급(成給)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통리군국사..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9월

9월 1일 무인유학(幼學) 권종순(權鍾純)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삼가 생각하건대,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도덕과 학문을 겸비하였다는 것은 책에 실려 있는 것인 만큼 아마도 신들이 하나하나 진술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네 명의 신하들의 문집을 가져다가 그 학문의 조예를 찬찬히 고찰해 보도록 하소서. 그리고 신이 이 네 명의 신하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여 이미 참월한 죄를 범하였으니, 진실로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아아!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 문충공 유계(兪棨), 문충공 ..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8월

8월 1일 무신시임 대신(時任大臣),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사(貳師), 빈객(賓客), 시임 각신(時任閣臣), 원임 각신(原任閣臣), 승지(承旨),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소견(召見)하였다. 전교하기를,"작년에 중궁전(中宮殿)을 맞아올 때에 충주(忠州)를 비롯한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에 대하여 아직 뜻을 표시하지 못하였다. 토지 면적에 따라 내는 부세(賦稅)를 적당히 줄여주어야 하겠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충주에 내려가 있을 때 해당 마을 사람들로서 수고한 자들도 묘당에서 관문(關文)을 보내어 해도(該道)에 알아보고 품처하여 시상(施賞)하도록 하라."하였다. 전교하기를,"상호군(上護軍) 민영위(閔泳緯)를 특별히 정..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7월

7월 1일 기묘전교하기를,"남간(南間)에 가둔 죄인 양주현(梁柱顯)을 서간(西間)에 옮겨 가두도록 하라."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삼가 하교하신 대로 당오전(當五錢) 5만 냥 중에서 호조(戶曹)에 2만 5,000냥, 선혜청(宣惠廳)에 1만 8,000냥, 병조(兵曹)에 7,000냥을 배분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남간(南間)에 가두어놓은 죄인 윤구(尹)가 횡령한 것이 3만 냥 이상이니, 승전(承傳) 내의 내용으로 네거리에서 곤장을 친 뒤 원악도(遠惡島)에 찬배(竄配)하겠습니다.현재 갇혀 있는 죄인 양주현(梁柱顯)은 횡령한 돈 3만 1,000냥 가운데 3,600여 냥은 추징하여 감영(監營)으로 보냈고, 나머지 2만 7,000여 냥은 귀속된 곳이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1..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6월

6월 1일 기유전교하기를,"지난해에 여러 경재(卿宰)가 참혹한 화를 당한 데 대해서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차마 말할 수 없다. 충숙공(忠肅公) 민겸호(閔謙鎬)와 문헌공(文獻公) 김보현(金輔鉉)은 다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고(故) 참판(參判) 민창식(閔昌植)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하고, 사판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이달로 벌써 돌이 되었다. 지난해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내 마음의 아픔을 어떻게 비유하겠는가? 고 영의정(領議政) 충익공(忠翼公)  【이최응(李最應)이다.】 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지난해 군란(軍亂) 때 조정 관원, 유학(幼學), 군교(..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5월

5월 1일 경진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강우형(姜友馨), 부응교(副應敎) 윤상익(尹相翊), 교리(校理) 김사준(金思準)과 신용선(申容善), 부교리(副校理) 김중식(金中植), 부수찬(副修撰) 윤길구(尹吉求)와 서광범(徐光範)이다.】 "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를 방축향리(放逐鄕里)하도록 한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참작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다시는 시끄럽게 굴지 마라." 하였다.【원본】 24책 20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3면【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이경하(李景夏)와 신정희(申正熙)를 방축향리(放逐鄕里)하도록 한 명을 거두어 주소서."하니, 비답하기를,"어찌 참작 없이 그렇게 하였겠는가? 다시는 시끄..

고종실록20권, 고종20년 1883년 4월

4월 1일 신해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에게 다섯 번째로 하유하기를,"내가 경에게 비답을 내린 것이 두 번이고 하유한 것이 네 번인데, 이것은 모두 다 마음속으로부터 나와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우려하는 경으로서는 응당 용감하게 나서야 하며, 나의 간절한 태도에 대하여 경은 공순하게 대하여야 한다. 나는 반드시 경을 불러내고야 말 것이니, 경은 필시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한결같이 의리에 부합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기대와 온 나라의 희망이 어찌 경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왔겠는가?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당일로 조정에 나오도록 하라."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북병사(北兵使) 구준현(具駿鉉)은 군사를 잘 다루어 변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