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3년 24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12월

12월 1일 갑오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여 장선징·민유중·이민서는 출사(出仕)시키고 이광직·이합은 체차(遞差)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일렀다."국가에서 믿는 자는 대장(大將)인데 이완(李浣)이 오래도록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체모로 볼 때 온당치 못하다. 내일 아침에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살피게 하라."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여 아뢰기를,"지난번 간직(諫職)에 있을 때 느닷없이 중론(重論)을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게 해준 일을 가리킨다.】 정지시켰으므로 물의(物議)에 비난을 받았다가 그대로 탄핵을 받고 체차되었으니, 지금 다시 감히 근밀(近密)한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일 을미지평 장선징이 아뢰..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11월

11월 1일 을축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인피하기를,"듣건대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창녀(娼女)에게 고혹(蠱惑)되어 누차 불러도 오지 않자 동생을 보내 데려오도록 하려다가 패려(悖戾)한 행동이 있게 되었다 합니다. 식은 수죄(首罪)에 해당되니만큼 나문(拿問)하라고 아뢰었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직접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 자는 식의 동생인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과 영신군(靈愼君) 이형(李濙)이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논하면서 실수를 면치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영풍군 식이 창물(娼物)에 고혹된 나머지 두 동생까지 보냈다가 패려스러운 짓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식이 수죄(首罪)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10월

10월 1일 을미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소장을 올려 체차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간병케 하였다. 병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삼가 살피건대, 조수익은 진신(搢紳)들 사이에 유아(儒雅)한 인물로 일컬어졌으며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여망(輿望)을 만족시켰다. 그런데 하나의 소를 올려 조경(趙絅)을 구한 일이 있으면서부터 송시열의 패거리가 크게 미워하고 무척 힘을 들여 배척하면서 다시 청로(淸路)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공의(公議)를 무시한 처사라 하겠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무(李堥)를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오시수(吳始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김휘(..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9월

9월 1일 을축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잇따라 소장을 올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일 병인사간 이정(李程)이 인피하기를,"환시(宦侍)의 교만한 습성은 법으로 응당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양달원(梁達源)의 죄를 논하다가 요청한 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계(停啓)하였으므로 그것만을 가지고도 물의로부터 이미 비난을 받았습니다. 달원이 사부(士夫)에게 모욕을 가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달원을 조율(照律)한 공사에 대해 조사해 처리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니, 이는 그가 무함하여 꾸미는 말만 신임을 받고 대간이 논한 것은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되는 셈으로서 신은 정말 개연한 마음이 듭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8월

8월 2일 정유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대저 학교(學校)는 교화(敎化)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삼대(三代)의 성법(盛法)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고, 단지 선비를 기르는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 급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사학(四學)103) 와 외교(外校)104) 에서 나눠 가르치고 그 중에서 선발하여 태학(太學)105) 에 올리는 것은 장차 국가에서 쓰기 위해서입니다. 훗날 등제(登第)하여 경상(卿相)이 되고 아래로 백집사(百執事)가 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서 배출되니,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는 자들이 진정 어질고 재주가 있으면 국가의 발전을 점칠 수 있는 반면, 어질지 못하고 재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쇠퇴하리라는 것을 알 수..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7월

7월 1일 병인헌부가 홍우원(洪宇遠)을 삭출(削黜)066)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파직만 시키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지난번 괴원(槐院)067) 에서 분관(分館)시킬 때에 본관(本館)의 관원들이 제좌(齊坐)하여 가부를 논한 결과 논의가 귀일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자기 의견만 치우치게 고집하여 두 번이나 파좌(罷坐)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장무관(掌務官) 이하 14원(員)이 이미 이 때문에 죄를 받았고 보면, 당초 소란을 야기시킨 장본인만 죄를 면하기는 이치상 어려운 일이니, 적발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이와 함께 본원으로 하여금 즉시 권점(圈點)하게 하되, 여전히 사정(私情)을 따라 소란을 일으켜 끝내 파좌케 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죄를 매기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6월

6월 1일 정유사헌부가 아뢰기를,"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저(李竚)를 지난번 통신(統臣)의 계사에 따라 수영(水營)에 잡아들여 결곤(決棍)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저가 태연히 병을 핑계대고 감사에게 보고하면서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잡아들여 결곤케 한 것은 조명(朝命)이고 군율(軍律)인데 평상시에도 이런 식으로 된다면 혹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호령하겠습니까. 법대로 처리한다면 그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는데, 나국(拿鞫)한 뒤 안율(按律)하여 정죄(定罪)케 하소서."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이에 앞서 귀국하던 왜선(倭船)이 다대포(多大浦)에 표박(漂泊)한 일이 있었는데, 관왜(館倭) 두 사람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나 다대포로 향하자 문을 지키던 군관들이 만류하려 하였으나 두 ..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5월

5월 1일 무진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우정(尹遇丁)이 인피하기를,"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 및 정원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동료의 피사(避辭) 가운데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는데, 성지(聖旨)가 지극히 엄하시어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므로 신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동료의 피사에 과격한 점이 실로 있기는 합니다만, 1편(篇) 속에서 반복하여 진달드리다가 누차 엄한 분부가 내려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대청(臺廳)에서 비답을 듣던 신하가 결국엔 엎어지고 자빠져서 물러나왔습니다. 이에 듣는 이마다 놀라고 의아해하며 분위기가 비탄에 쌓이고 참담하기만 한데, 이것이 어찌 평소 성명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신들의 견해도 동료와 다름이 없는데, ..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4월

4월 1일 무술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이행진(李行進)을 병조 참판으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이세익(李世翊)을 지평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홍우원(洪宇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신들이 지난번 인대할 때, 감히 계후한 뒤 자기 소생으로 제사를 주관케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진달드리면서 속히 간신(諫臣)의 청을 윤허해 주시도록 청하자, 상께서 해조에 특별히 명하여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를 베껴 올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해조의 문적(文籍)이 병란으로 분실되는 바람에 끝내 상고해내어 계달드릴 수 없게 됨으로써 성조(聖朝)의 영갑(令甲)을 징험할 수 없게 ..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3월

3월 1일 기사동지 정사(冬至正使) 여이재(呂爾載), 부사 홍처대(洪處大), 서장관 이단석(李端錫)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서장관이 문견록(聞見錄)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저들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였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운남(雲南)·귀주(貴州)·남경(南京)·서촉(西蜀) 등지가 이미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삼계(吳三桂)는 현재 운남과 귀주의 접경 지역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지룡(鄭芝龍)과 손완(孫莞)이 해도(海島)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항복을 청하였는데, 청국(淸國)에서 대답하기를 ‘올테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답니다. 귀주의 백문선(白文先)과 이수창(李守昌)은 모두 수적(水賊) 노릇을 하다가 영력(永曆)017) 에게 귀순하였는데, 수창은 안..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2월

2월 1일 경자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2월 2일 신축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청대하여 아뢰기를,"근일 일을 보건대, 걱정되는 것이 많습니다. 영상이 벌써 며칠째 인피하며 나오지 않고 있고, 이조는 판서만 공무를 행하고 있으며 양사 역시 출사하는 사람이 없고, 호판 정치화(鄭致和)는 또 세 번째 상소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이유태(李惟泰)가 올라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가 상소하여 진달한 일을 오래도록 품처(稟處)하지 못하고 있으며 군정(軍政) 역시 정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호판을 패초(牌招)하여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하고, 이어 도승지 권우(權堣)에게 이르기를,"이 뒤로는 침을 맞을 때라 하더라도 정원에 계류된 공사(公事)는 수합해서 미품(..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1월

1월 1일 경오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스스로 염치에 관한 의리를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차해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이때 대신의 상소 내용 가운데 ‘사류(士類)가 미워하며 많은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장령 곽제화(郭齊華)가 일을 말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려 외직에 보임(補任)되는 명을 받자, 양사가 불가하다고 쟁집(爭執)하며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에 따라 정론(停論)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임소(任所)로 부임케 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간관이 다시 이를 쟁집하였으나, 상이 엄히 비답을 내리며 꺾어 버렸다. 그래서 정중이 이렇게 피혐했던 것이다. 1월 2일 신미사간 김우형(金宇亨) 역시 곽제화의 부임을 독촉한 일과 관련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4년 1663년 12월

12월 1일 갑오비변사가 강계 부사 이정기(李廷機)는 삼사를 거친 적이 없는데도 뛰어올라 당상 변쉬(邊倅)에 제수된 일로 아뢰니, 체임하여 전직(前職)인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잉임되었다. 우윤 조복양이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탄핵을 받은 뒤, 강 밖으로 나가서 사직하기를,"사부(士夫)로서 몸을 지키는 일은 염치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이것이 없다고 하면 무엇을 가지고 자립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은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고 아끼지 못한 채 염치를 완전히 무시하여 어리석다는 지적을 받고도 탄핵을 견디며 떠나지 않고 더러움을 달갑게 여김으로써 세상에 뻔뻔스럽게 행동하였으니, 아래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리고 위로 조정을 욕보였습니다. 이치와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끝까지 임금 곁에 마음놓고 지낼 ..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4년 1663년 11월

11월 1일 을축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인피하기를,"신들이 이전에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을 잡아다 문초하자고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식이 창기에게 미혹되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우를 보내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가 패악한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식이 수죄(首罪)이니 잡아다 문초하자고 아뢰는 일이 안 될 것은 없으나, 직접 가서 소란을 피운 자는 식의 아우들인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과 영신군(靈愼君) 이형(李濙)이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논하면서 잘못이 있었으니 어찌 감히 편안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영풍군 식이 창기에게 미혹되어 있어 그 두 아우를 보냈다가 패악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식은 당연히 수죄가..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 1663년 10월

10월 1일 을미우의정 정유성이 상차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병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수익은 바로 유성룡(柳成龍)의 외손으로서 평소 시망(時望)이 있었고 청현(淸顯)의 직을 역임하였다. 노모(老母)를 여주에 모셔두고 왕래하면서 관직에 종사하였는데, 조경(趙絅)을 구제하기 위하여 소를 올렸다가 대간으로부터 ‘수익이 어미가 병중에 있다는 핑계로 국상(國祥)에도 오지 않아 공론이 바야흐로 일고 있는데도 사교(私交)를 위하여 구원의 손을 펴고 있다.’ 하는 논핵을 받았다. 그뒤로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자취를 감춘 채 시골에 있었다. 지금 또 굳이 사양하고 오지 않은 것이다. ..